‘라이프 오브 파이’는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영화다. 누군가에게는 영상미 넘치는 판타지 영화, 한 청년의 표류를 그린 영화, 혹은 신의 존재를 논하는 영화일 것이다. 아마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저 느낌대로 보는 것이 편할 수 있다. 만약 영화에 숨겨진 철학적인 내용을 파헤치고 싶다면, ‘믿음’이라는 행위에 대해 영화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고민해보면 어떨까.
영화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믿음에 대한 생각을 내비친다. 파이가 어렸을 적, 힌두교와 가톨릭교, 이슬람교를 동시에 믿는 장면이 소개된다. 영화 서두에서 파이가 하는 말이다. “의심은 좋은 거예요. 믿음을 유지시켜 주죠.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믿음의 힘을 모르니까.” 언뜻 보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단교도로 보일 수 있지만, 파이는 그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할 도구를 찾았을 뿐이다. 표류 중 폭풍을 만난 파이는 신에게 소리친다. “왜 겁을 주는 건가요.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 바라는 게 무엇이죠?” 신의 대답은 폭풍을 지나고 닿은 식인 섬이었다. 파이는 섬에서 휴식과 경각심을 동시에 얻는다. 결국 파이는 섬을 벗어나 다시 표류를 시작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보이는 섬은 누워있는 신의 모습이다. 파이가 깨달은 신의 뜻은 ‘포기하지 말라.’로 읽힌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파이는 말 한다. “신의 존재도 믿음의 문제죠.” 믿었기 때문에 신이 존재했고 메시지가 들렸으며 끝까지 살 수 있었다.
“신은 죽었다.” 니체는 이 말을 통해 절대적인 가치는 없으며 인간은 항상 움직이며 나아간다고 말했다. 극중 파이와는 대립되는 표현이지만, 그 결과는 일맥상통한다. 파이는 신의 존재를 믿고 그와 문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다.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고 궁금증을 해결하며 자신을 발전시킨다. 이는 니체가 정의한 초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나아간다고 생각했고 파이는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간접적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다. 결국 영화는 믿음(신앙)이란 자신이 필요성을 느껴 만들어내는 개념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호랑이와의 표류에서도 믿음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캐나다로 향하는 배에 주인공 파이 가족이 동물들과 함께 타고 있다. 배는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에서 폭풍을 만나고, 파이는 사람 한 명 없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호랑이와 구명보트에서의 생존을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금방이라도 죽일 것만 같았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 덕분에 가능했다. 처음엔 먹히지 않기 위해, 그 뒤론 먹이기 위해, 마지막엔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끝내 살아간다. 처음에는 살고 싶다는, 어쩌면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생각으로 호랑이와의 표류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사항은 믿음으로 변한다. 호랑이와 공존할 수 있겠다는 믿음, 결국 구조되어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이 그를 계속해서 살아있을 수 있게 했다. 작은 구명보트 위에서 살아간 200일이 넘는 시간동안 ‘믿음’은 삶의 동력이었고, 선택의 순간에서 그를 이끌었던 힘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끝나는 듯 했으나,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된다. 사실 구명보트에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 타고 있었으며, 사람을 살리는 대신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끔찍한 살육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파이가 만들어낸 믿음이다. 이러한 정보는 관객을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호랑이와 함께 했던, 이상하리만큼 신비롭고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이냐, 아니면 생존을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살육을 잊기 위한 허구의 이야기이냐. “어떤 스토리가 마음에 들어요?” 질문을 던지는 파이의 시선은 화면을 뚫고 우리에게 닿는다. 관객 역시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영화를 끝내야 한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파이의 표류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각자의 믿음대로 행동하고,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이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힘겨운 상황들에 놓여도 끝내 살아낸다. “이미 일어난 일에 무슨 의미가 필요해요?” 파이의 말처럼, 우리는 지나간 일에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이성에만 의지하여 나아가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표류하는 상황에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에 기대어 우리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
'공대생 > 공대생이 바라본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이지 않는 손, 시장에 조종당하는 우리 (0) | 2021.04.18 |
---|---|
인간과 원자력에 관하여 (1) | 2021.03.22 |
한국에서 스타트업이 안 되는 이유 (0) | 2021.03.07 |
꼭 똑똑한 애들이 시험 망쳤다 하더라 ㅡㅡ - Dunning–Kruger effect (0) | 2021.02.25 |
생명 연장의 필요성에 관하여 (0) | 2021.0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