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은 직접 텃밭을 가꾸었다. ‘친경’이라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고 농사를 권장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왕이 백성의 삶을 체험하고 그 고충을 이해하는 용도로써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민주주의 하에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자본주의 하에서 고객은 왕이다. 거대 유통기업인 쿠팡의 한 고객으로서, 나도 내가 주문한 물건이 어떻게 배송되는 지를 알아보고자, 쿠팡 일용직에 도전했다.
위는 헛소리였고, 방학이 되어 집에서 시간만 소비하던 나에게 조금의 생산성과 경각심을 선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 아르바이트는 부담스러웠고, 시급만 받기도 아까웠다. 쿠팡 일용직은 이런 나에게 좋은 선택지였다. 첫 근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Hub 공정, 방학을 맞이하여 밤낮이 바뀐 김에 시급이 조금 더 좋은 야간 근무로 지원했다. 어차피 고생할 거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하지 않겠는가.
근무 전
쿠팡에는 다양한 물류센터가 있다. 각 센터가 각각 일용직을 모집한다. ‘쿠펀치’라는 앱을 통해 근무를 지원할 수 있는데, 이게 근무 확정 받기가 어려웠다. 거의 10번 중에 2번 정도 확정을 받았던 것 같다. 야간 근무에 지원했기 때문에 전날 밤 늦게 확정 문자가 오게 된다. 안내에 따라 셔틀을 신청하고, 컨디션을 맞추기 위해 동이 틀 때 즈음 잠에 들었다.
셔틀을 타러 가는 길, 알고 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딱 보면 같이 가는 사람들이구나 싶은 분들이 대충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셔틀을 타고 대략 1시간 정도 달린 것 같다. 여러 버스가 한 번에 도착하는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덕분에 대충 섞여서 따라가면 되었다. 다만, 줄을 서는 시점에서 신규 직원은 줄을 무시하고 카운터 가운데로 가면 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줄 서느라 헛된 시간을 보냈다..
신규 직원이기 때문에 잠시 대기했다가 여러 교육을 듣고 현장에 배치되어야 했다. 문제가 있었는지 대기만 20~30분, 교육은 1시간~1시간 30분을 진행해서 대략 2시간 정도를 날로 먹었다.
근무 중: 복장, 업무, 식사, 휴식
교육을 마치고 안내에 따라 현장으로 들어갔다. 먼저 안전화를 갈아신고 카운터 같은 곳에서 바코드를 찍은 후 배치되었다. 허브 공정은 대충 상하차에 관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 때문에 실내지만 한쪽 벽면이 뚫려있고, 외부 공기가 잘 들어온다. 그러나 내가 안쪽에 배치되어서인지 아니면 몸을 움직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최저기온 섭씨 3도 정도였던 날로 기억하는데, 반팔 티셔츠 위에 맨투맨 하나 덜렁 입고도 춥다고 느끼지 않았다. 안전화는 앞부분이 딱딱하게 모양 잡힌 신발이다. 악명에 비해 생각보다 괜찮았다. 군화보다 훨씬 편했고, 발 볼이 넓은 편이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평소에 신발을 신는다면 한 사이즈 크게 신는 것이 맞긴 하겠다.
내가 배치 받은 곳은 상자에 물건을 담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쿠팡 하면 쥐색 비닐봉투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것을 지역별로 그리고 배송 날짜 별로 플라스틱 상자에 담는 것이다. 지역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면서 알아서 구분해 떨어뜨리고, 작업자는 간단히 확인만 하고 상자에 담는다. 이게 끝이다. 굉장히 간단한 작업이다. 그러나 물건이 계속 떨어지기 때문에 앉아서 쉴 수가 없고, 무게감이 있는 물건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등이 아프다가 나중에는 발바닥과 다리가 아프게 된다. 무엇보다 시간이 잘 안 가서 집에 가고 싶어진다.. 최신 음악도 틀어주는 것 같지만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자정이 넘기 전 저녁시간이 주어진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쿠팡 밥이지만 나는 학식도 맛있게 먹는 편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별로였다.. 살기 위해 배를 채워두는 느낌 딱 그 정도였다. 다음에는 간편식을 먹을 것 같다.. 맛이라도 보장되니.. 밥을 먹고 남은 시간은 작업장에 반입금지였던 폰도 하고 300원짜리 음료수도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작업 중간에도 한 번 쉬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식사시간만큼 길지 않다. 1시간이 지나면 다 같이 모여 안내를 듣고 작업장에 들어가므로, 이때도 대충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면 된다.
물건은 많이 떨어질 때도 조금 떨어질 때도 있다. 어떤 지역은 한 번에 많이 몰리고, 어떤 지역은 물건이 없기도 한다. 그래서 작업자마다 대충 구역을 정해 왔다갔다 하면서 작업을 하게 된다. 즉, 할당된 작업량이 없다는 이야기다. mz라는 특성을 혐오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곳이 마음에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내가 아는 mz라면 이러한 조건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내가 안 해도 어차피 다른 사람이 끝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자기 일을 해내는, 심지어 작업에 대한 조언도 해주고 물량이 쌓여 허덕이는 곳에 말없이 가서 도와주는, 그런 아재들의 감성. 괜히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근무 후
그러나 퇴근 길, 다음 날 근무도 확정받은 상태였던 나는 해당 근무를 취소했다. 집에 가면 오전 6시, 잠들고 일어나 다시 출근할 생각을 하니 너무 스트레스였다. 직장인들 정말 대단하다.. 배가 고파 버거라도 먹고 집에 갈까 싶었지만, 집 근처에 가니 빨리 자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정리하면, 쿠팡 일용직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 아니다. 물론 육체적인 부분에 한정된 말이며 내가 받은 작업만 그런 것일 수 있다. 시간이 가지 않고 반복적인 일을 해야한다는 점이 은근히 스트레스다. 하루만에 10만원이 넘는 돈을 벌었으니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매일은 못하겠다. 돈 벌기 참 어렵다는 사실을 느끼며 돈을 아껴쓰자고 다짐한다. 어쩌다 나태해졌을 때, 고민이 많아졌을 때, 한 번씩 시도하면 좋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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